시오니즘 | 시온으로의 귀환을 염원한 유대인들의 함성

시오니즘(Zionism)이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벌인 운동을 가리킨다. 시오니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찾아야 할 시온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일까?

시오니즘 뜻

시오니즘이란 서기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벌인 민족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시온주의, 시온운동, 유대주의, 유태주의, 이스라엘 회복운동이라고도 한다. 시오니즘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고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면서 목적을 이루었다.

시오니즘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네이선 번바움(Nathan Birnbaum)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 네이선 번바움은 그가 발행하는 유대 민족주의 잡지 《Self-Emancipation(자기해방)》에서 ‘시오니스트(Zionist)’,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말을 최초로 언급했다.

시오니즘의 어원, 시온

시오니즘의 어원은 ‘시온(Zion)’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시온은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언덕을 가리킨다. 고대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제2대 왕 다윗은 여부스인들이 살고 있던 시온을 점령한 후 성곽을 증축하고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사무엘하 5:7~9). 시온 정복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지 약 400년 만에 이루어진 일로, 다윗의 가장 주목할 만한 치적이라 할 수 있다. 시온은 ‘다윗성’이라 불리며 이곳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안치한 후 정치적, 종교적 거점이 되었다(역대상 15:29).

시온성(다윗성)의 모형.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사진: Ariely 作,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다윗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솔로몬은 부왕의 뜻에 따라 다윗성, 즉 시온성 북쪽에 인접한 모리아산(Mount Moriah)에 성전을 건축하고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겼다(역대하 3:1, 5:1~7). 모리아산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곳으로, 성전이 세워진 후 유대인들은 이곳을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시온(다윗성)과 모리아산(성전산)은 지리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성전이 건축된 후 이 두 곳을 아울러 시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을 시온산이라고 칭하고 있다(시편 78:68~69).

이후 시온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등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사야 8:18, 24:23, 히브리서 12:22~24). 시편 기자는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 생활하는 동안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표현했다(시편 137:1).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시온은 민족적 상징성을 갖는 중요한 장소로, 마음의 고향이자 하나님이 회복해주실 약속의 땅이라고 인식되었다.

시오니즘의 역사

시오니즘의 역사적 배경은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3년경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놓이고,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는 국난을 겪으며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나라를 잃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을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각지에서 그들만의 유대교적 전통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살았다. 혹은 유럽 사회에 동화되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은 채 완전히 유럽인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도 적지 않았다.

시오니즘의 서막을 연 반유대주의와 포그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과 박해를 당했다. 예수님을 배척한 민족, 선민사상으로 자신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고집하는 민족이라는 점은 기독교가 번성한 유럽에서 반감을 불러왔고, 상업과 금융업계의 선두 기업이 대부분 유대인의 것이라는 점은 돈에 집착하는 민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16세기 말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쓴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대인 악덕 사채업자 샤일록은 당시 유럽 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편견이 반영된 사례로 꼽힌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혐오하는 반유대주의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더욱 힘든 처지에 놓였다. 1881년 제정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가 암살당하면서 러시아 정부는 유대인을 배후로 지목했다. 이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학살, 이른바 ‘포그롬(Pogrom)’이 자행되었다.

키시뇨프(Kishinyov, 키시너우) 포그롬 이후 장례식을 치르는 유대인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호베베이 시온(Hovevei Zion,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결성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장려했다. 1882년부터 1903년까지 약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이를 ‘1차 알리야(Aliyah)’라고 한다. 알리야는 히브리어로 ‘올라가다’라는 의미로, 이스라엘 성지로 귀환하는 것을 말한다.

시오니즘에 불을 지핀 드레퓌스 사건

한편,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시오니즘이 번지기 시작했다. 선봉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던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기자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이었다. 프랑스 특파원으로 일하던 그는 1894년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군사 기밀을 넘긴 혐의로 체포된 사건을 접하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이 그것이다.

프랑스군 수사기관은 처음부터 ‘유대인’인 드레퓌스를 용의선상에 올렸다. 기획된 수사와 날조된 증거로 그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고 군에서 해임되었다.

드레퓌스가 군에서 해임된 사건을 다룬 프랑스 일간지 《Le Petit Journal(르 쁘띠 저널)》 기사.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유대인 장교의 간첩 사건은 프랑스인들의 반유대 감정을 더욱 들끓게 했다. 당시 명망 있던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가 대통령에게 드레퓌스의 무고함을 알리는 내용의 편지 ‘나는 고발한다’를 언론에 공개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유대인을 두둔한 대가는 살해 위협, 소송, 망명이었다. 재심이 진행되어 드레퓌스의 무죄가 밝혀졌을 때 졸라는 의문의 가스 중독으로 이미 사망한 후였다.

헤르츨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에 드러난 강한 반유대주의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유럽이 아무리 자유롭고 평등을 외쳐도,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든지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유대인들이 안전하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896년,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의 필요성을 설명한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를 발간했다. 1897년에는 세계 곳곳의 유대인 대표자들을 스위스 바젤에 불러 첫 ‘시오니스트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에 공식적인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 목표로 정해졌다.

이후 헤르츨은 1901년, 당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있던 오스만튀르크와 협상에 나섰으나 거절당했다. 1903년 영국은 영국령이었던 아프리카 우간다의 비거주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을 담은 ‘우간다 계획(Uganda Project)’을 제안했지만 러시아 유대인들의 반발로 수용하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04년 헤르츨이 사망했으나 러시아 유대인들의 주도로 시오니즘이 이어졌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1904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된 2차 알리야는 1차 때보다 5천 명 더 많은 4만 명이었다. 주로 러시아에 살던 젊은이들이었는데,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 실패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면서 또다시 포그롬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유대 국가 건설의 단초를 제공한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알리야는 중단되었으나 시오니즘은 더욱 강렬해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전쟁 비용이 부족했던 영국은 유대계 은행 재벌 로스차일드가에게 은밀히 거래를 제안한다.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child)는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 당시 시오니즘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과 논의한 끝에 전비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영국으로부터 이스라엘 재건을 약속받는다.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J. Balfour)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발표한다. 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려는 영국의 속셈이 담겨 있긴 했으나 유대인들에게는 잃어버렸던 옛 조상의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밸푸어 선언이 담긴 엽서.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게 되었고, 약속한 대로 유대인들의 이주를 승인했다. 1919년부터 1939년까지 3차, 4차, 5차에 걸쳐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이중 상당수는 그곳을 다시 떠나기도 했으나 유대인 이민자들이 급증하자 7세기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밸푸어 선언 조건은 유대인의 이주를 무제한으로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1939년부터는 연간 유대인 이주민 숫자를 제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 무렵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해 대학살(Holocaust,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겪는다. 나치당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의 총리가 된 후 펼친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굶주림과 질병, 교수형, 총살 등으로 사망하거나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나치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졌던 역사가 보존된 폴란드 남부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더욱 간절히 그들만의 안전한 독립 국가를 염원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가담했고, 미국의 유대인들까지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유엔의 결정과 이스라엘 독립 선언

이주민 유대인들과 터줏대감이었던 아랍인들과의 갈등은 나날이 격화되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 후 창설된 국제평화기구,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에 맡겼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유대인 국가와 아랍이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거의 절반씩 나누어 가지되 예루살렘은 국제공동 관할 구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아랍은 이에 반발해 무력투쟁을 벌였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영국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위임통치를 포기하고 유엔에 넘긴 후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인 1948년 5월 14일, 독립을 선언했다. 시오니즘 운동가이자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된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은 “우리는 유대 민족의 역사적 권리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을 선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며 유대 국가 건립을 공식화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 독립을 선언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유대 국가 재건에 대한 평가

유사 이래 한 국가가 수천 년 전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사례는 이스라엘이 유일하다. 그런 까닭에 역사학자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두고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인간 역사의 단 한 번 기적 로마군에 멸망당한 뒤 피와 눈물의 박해 아래 2000년 동안 세계를 유랑한 그들은, 불사조 같은 날갯짓으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건설해낸다. 인류 역사상 이 위대한 기적을 실현한 유대인의 놀라운 그 성공집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65만 명의 유대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한 지도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북받치는 눈물을 억누를 수 없었다.

《솔로몬 탈무드》, 이희영, 동서문화사

사실상 이스라엘의 재건은 2천 년 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하신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쳤던 유대인들의 열망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곳에 터를 잡고 살던 아랍인들과의 끊임없는 충돌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전산 전경. 이슬람 사원과 통곡의 벽.

성경이 가리키는 시온

성경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야 할 시온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사야 4:3)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으로 이르게 할 것임이니라

(예레미야 4:6)

성경이 가리키는 시온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대하기는 어려운, 영생과 구원의 축복이 허락된 곳으로 단연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성경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시온은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 영적인 세계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이사야 33:20~24)

그러나 너희(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브리서 12:22)

→ 시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문서를 참고하세요

[참고 자료]
1. ‘Nathan Birnbaum’, Jewish Virtual Library
2. 히틀러 “시오니즘은 세계지배 음모, 유대국가 건설로 안 그친다”, 《프레시안》, 2024. 8. 3.
3.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인 분쟁: 이들이 싸우는 이유, 《BBC》, 2021. 5. 18.
4. 《중동의 재조명(국제정치)》, 최성권, 한울아카데미
5.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김희보, 가람기획
6. 하나님의 교회 대표 사이트 《WATV》
7.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